Seochon Brand Week - People Interview


서촌은
삶이다


정양인, 최이호

서촌의 골목을 오래 들여다보면 이 동네는 풍경보다 사람으로 기억된다. 오랜 집과 오래된 가게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길을 오르내리며 하루를 살아내는 얼굴들이다. 정양인·최이호 부부는 그 얼굴들 중 하나다. 신혼의 첫날도, 아이의 첫 걸음도, 인왕산이 열어주는 계절의 변화도, 골목에서 나누던 인사도 모두 이 동네에 스며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특별한 장면 대신 일상에서 천천히 쌓인 시간들을 담고 있다. 도시 안에서 계절을 배우고,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만났으며, 이웃에게서 마음을 건네받고, 그 마음 덕분에 자신도 조금씩 변해온 과정. 이 글은 두 사람이 서촌에서 함께 쌓아온 작은 기록이자, ‘살아지는 삶’에 대한 조용한 증언이다.

‘나’에서 ‘우리’가 되어 준 서촌

두 사람의 서촌은 신혼집을 찾던 순간부터 시작됐다. 함께 살아갈 첫 공간을 고르던 날, 자연스럽게 이 동네로 발걸음이 향했다. 골목의 공기, 한옥의 낮은 지붕,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흐르는 느린 리듬이 두 사람에게 오래 머물고 싶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혼의 시간이 어느새 8년이 지나고, 최근 아이와 함께 빌라로 이사한 지금까지도 두 사람의 주소는 여전히 서촌에 머물러 있다. “처음부터 여기 살고 싶었어요.” 이호 님의 말에 양인 님은 미소를 지었다. 이 동네는 부부에게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가 자라는 장소였다.


우리가 계절을 배운 곳

양인 님에게 서촌은 계절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곳이었다. 벚꽃이 골목에 날리는 봄, 광화문 분수에서 물놀이로 가득한 여름, 인왕산 단풍이 짙게 번지는 가을, 한옥 마당에 눈이 고요하게 쌓이는 겨울까지. “도시인데 계절이 먼저 와요.” 반면 이호 님의 서촌은 코너였다. 집 근처의 좁은 골목을 돌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고, 고양이가 나타나기도 하고, 관광객이 길을 헤매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같은 동네를 걸어도 서로 다른 감각으로 기억하는 두 사람의 서촌은, 그만큼 풍경의 층위가 깊은 동네였다.


동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이를 안고 골목을 나설 때마다 동네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들은 아이에게 말을 걸고, 체부동 빵집에서는 생일마다 케이크를 챙겨주었고, 고기연 앞을 지나면 사장님이 음료나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정이 먼저 다가오는 동네예요.” 양인 님은 그렇게 말했다. 집 앞에 놓인 작은 화분들, ‘가져가셔도 좋아요’라고 적힌 말 한마디, 그리고 그 화분을 잘 키워 다시 인사하게 되는 연결의 순간들. 이호 님도 “여긴 마음이 먼저 보여요”라고 웃었다. 서촌은 두 사람에게 사람의 온도로 기억되는 동네였다.


사진으로 남긴다면 어떤 장면일까. 양인 님은 아이가 인사하고 어른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네던 음료를 떠올렸다. 그 순간의 얼굴들—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환하게 웃던 장면. 이호 님은 수성동 계곡의 풍경을 떠올렸다. 인왕제색도 아래처럼 사람들이 낮게 모여 있는 모습.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쉬어가는 편안함. 둘이 말하는 장면은 달랐지만, 그 장면들 모두 ‘서촌에서의 하루’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살다 보니 마음도 변했다

양인 님은 서촌에서 살며 “사람이 둥글어졌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받은 친절이 많아지면 자신도 그 마음을 닮아간다고 했다. 예민했던 반응들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좋은 걸 더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 변화. 이호 님의 변화는 이웃과 관련되어 있었다. 오래 알던 얼굴들이 하나둘 이사를 가고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져 동네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아쉬움이 생겼다. 그럼에도 그는 길을 잃은 외국인을 도와주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예전엔 그냥 지나갔을 텐데… 이제는 도와야 할 것 같더라고요.” 시간은 두 사람의 마음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꿔놓았다.


두 사람의 바람은 단순했다. 소규모 찻집들이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고, 월세가 너무 가파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실제로 사는 사람들이 계속 머물 수 있는 동네였으면 한다는 마음. 에어비앤비가 늘어나는 대신 주민이 줄어드는 현실도 자연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가능하면 아이가 클 때까지는 여기서 살고 싶어요.” 두 사람이 이 동네에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는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래 이곳에 스며 있는 자신의 삶 때문이었다.


우리가 서촌을 부르는 이름

마지막 질문은 하나였다. ‘서촌은 두 사람에게 어떤 단어로 남을까요?’ 여러 번의 웃음과 농담을 지나 도착한 답은 같았다. “서촌은… 삶이다.” 양인 님이 시작한 문장을 이호 님이 자연스럽게 이어붙였다. 신혼의 첫날부터 아이의 성장까지, 골목에서 주고받은 인사와 사라진 집들까지. 두 사람의 지난 8년을 하나의 문장으로 묶는 말이었다. 서촌은 그들에게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살게 하고 마음을 바꾸게 하고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 ‘삶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서촌은 풍경보다 관계로 이어지는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이 먼저 말을 걸고, 이웃이 마음을 건네고, 사라지는 것과 생겨나는 것 사이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의 속도가 천천히 쌓여 있는 곳. 양인 님과 이호 님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하고, 다정해지고,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을 키워왔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서촌은 삶이다. 부부가 함께 건너온 시간 위에서, 앞으로의 서촌도 조용히 두 사람의 걸음을 따라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