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chon Brand Week - People Interview


기억이 머무는
나의 보금자리


김혜숙

그녀가 서촌에서의 사소한 발견을 떠올렸을 때 맨 먼저 도착한 단어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44년 동안 한 동네를 지켜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시간의 무게는 말투와 표정, 그리고 골목을 걸어오는 걸음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옥인동에서 내려오는 길은 그녀에게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일부였다. 

강아지 똑순이와 수없이 걸었던 산책길, 합창단을 다녀오던 길, 인왕산 자락과 이어지는 돌담길들은 그녀의 하루와 계절을 담아온 풍경이었다. 그 길을 걸어온 그녀를 마주한 순간, 이번 인터뷰는 오래 살아온 이웃의 회상이 아닌 ‘서촌이 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조용한 기록이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동네, 나의 시간

“인생을 다 여기서 살았어요.” 김혜숙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옥인동에서 44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서촌은 태어난 곳, 자란 곳, 그리고 지금도 머무는 곳이다. 결혼 후에도 이 동네를 떠날 생각을 해본 적 없고, 앞으로의 노후까지 이곳에서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서촌은 그녀에게 주소 이상의 의미, 삶의 결을 만든 ‘집’이었다.


인왕산이 들려준 풍경

서촌에서 가장 애정하는 장소를 묻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인왕산을 이야기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를 꼭 보러 가요. 얼마나 피었나 매년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죠.” 그 아래 치마바위가 보이는 소나무 숲길 역시 그녀에게 소중한 공간이다. 마음이 울적할 때 혼자 생각을 정리하러 찾는 장소. 솔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녀가 말하는 ‘나만의 서촌’은 번화한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과 바람이 있는,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풍경들이었다.


원씨네 가게의 오래된 숨결

단골 가게 중 하나를 묻자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원씨의 가게’를 떠올렸다. “47번지의 원씨네 가게예요. 제가 어릴 때부터 있었던 곳이죠.” 세 들어 살던 집의 쪽문은 바로 그 가게로 이어졌고,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시장에 가지 못할 때 그곳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곤 했던, 가난하면서도 따뜻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지금도 그 앞을 지나면 과자의 먼지 냄새마저 반갑다며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개발로 주변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 가게만큼은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품은 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44년의 서촌, 변화의 서촌

김혜숙이 살아온 서촌은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가 겹쳐진 동네였다. 인왕산이 막혀 총소리가 들리던 때도 있었고, 동네가 전부 한옥으로 가득했던 시절도 있었으며, 개발과 재개발의 파도가 한 차례씩 지나갈 때마다 익숙했던 풍경은 조금씩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옥인아파트가 있던 자리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지금의 수성동 계곡 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우리 아이들의 추억이 묻힌 곳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많이 애달팠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시간이 바꾸어간 장소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예전엔 이웃이 서로의 얼굴과 사연을 알고 지내던 곳이었다. 문을 나서면 아는 사람과 마주치고, 골목마다 이웃의 삶이 오갔던 때. 지금은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아졌지만, 그녀에게 서촌은 여전히 삶을 지탱해준 자리였다.


지켜야 할 것들, 이어야 할 것들

앞으로의 서촌에 바라는 점을 묻자 그녀는 ‘공존’을 이야기했다. “여기는 구와 신이 공존하는 곳이에요. 새로운 것만 좋다고, 옛것을 다 없애버리면… 마음이 아파요.” 마트가 생기며 시장의 기능이 사라지고, 상업지구가 커지면서 사람이 부딪혀 살던 삶의 자리가 줄어드는 현실이 서운하다고 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과거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서촌이 지녀온 리듬과 결을 잃지 않는 것이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녀는 서촌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며 잠시 고민했다. 빠르게 변해가는 동네의 속도는 때로는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그럼에도 서촌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청춘을 보냈고, 아이를 키웠고, 삶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겪어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웃들이 북적이던 골목과 사라진 계곡의 흔적, 지금은 바뀌었지만 한때 분명 존재했던 장면들이 그녀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에게 서촌은 ‘기억’이었다. 

지나간 순간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이 겹겹이 쌓여 남아 있는 집.

그리고 그 기억들은 앞으로도 조용히, 꾸준히 그녀의 삶을 따라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