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chon Brand Week - People Interview


다양함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 자리


김혜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공간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묘하게 복합적인 감정을 남긴다.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밀려오고, 예전에 지나쳤던 풍경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누상동에서 자라던 김혜란 님은 성인이 되어 한동안 이곳을 떠났다가, 결혼 후 다시 발걸음을 돌려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위에 ‘엄마’라는 현재의 시간이 덧입혀졌고, 그 두 겹의 시간이 겹치는 자리에서 그녀는 이곳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계절을 다시 배우게 한 길

다시 돌아와 아이와 함께 걷기 시작한 새 아침의 길은 오래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을 품고 있었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인왕산이 정면으로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매일 다른 색으로 풍경을 칠해놓은 듯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휴대폰을 보며 지나쳤던 길이었고, 생활 동선도 달라 인왕산을 이렇게 마주할 일도 없었다. 아이의 발걸음과 함께 속도를 맞추어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계절의 흐름이 얼마나 아름답게 이 공간을 감싸 안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배웠다. 산의 그림자는 날마다 다르고, 빛은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 작은 변화들이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오래된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

아이의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 날, 같은 자리에서 초등학교 동창을 마주한 순간은 이 지역이 가진 특유의 연결성을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이제는 각각 아이의 부모가 되어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또, 집 근처에 사는 아이 키우는 이웃은 때마다 옷이나 음식을 문고리에 걸어두며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었다.


혜란 님은 “서울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곳이 아직 있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기억해온 서촌의 따뜻함이 육아를 시작한 지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호의나 인사 이상의 의미였다. ‘아이가 있는 삶’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생활의 결이 달라지는 공간의 폭

잠시 신촌과 숙대 근처에서 살던 시절, 그녀는 대단지 아파트 특유의 균질한 분위기 안에서 스스로를 자꾸 비교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모두가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사는 듯한 공간에서는 작은 차이도 흔들리는 감정으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서촌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생활 방식과 다양한 형편,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비교를 부추기는 구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머무를 수 있게 하는 폭이 넓은 곳이라는 것을 그녀는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조금 잘해도, 조금 못해도 너무 드러나지 않는 곳. 그냥 나답게 살아도 괜찮은 공간.” 그 여유 덕분에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고, 삶의 결 역시 보다 부드러워졌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바라는 것들

지금의 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크지만,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입장에서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걷는 길의 보도가 좁거나, 아이가 차도를 함께 걸어야 하는 순간이 종종 있었기에 안전에 대한 걱정도 있다. 그리고 좋은 자연환경과 다정한 어른들, 매력적인 생활 기반에 비해 학생을 위한 인프라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유아 시기에는 더없이 좋지만, 청소년을 위한 환경은 얼마나 마련되어 있을까?”라는 질문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혜란 님은 아이가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는 꼭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이미 이 주변의 호흡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20년 전에 이곳에서 자라던 소녀가 지금은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 시간의 차이를 관통하며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지역이 품고 있는 ‘다양함과 다정함’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분위기. 누군가의 부족함이나 삐뚤어진 모서리까지도 함께 품어주는 너그러움. 혜란 님이 이 공간을 설명하며 떠올린 단어는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곳’이었다.


그녀가 앞으로도 이곳에서 살고 싶은 이유는 결국 명확하다. 그저 자신답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공간, 그 안에서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삶. 그 편안함이 그녀에게 서촌이 준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